
너와 나의 2월
“졸업 축하해 반장.”
“고마워. 너도 졸업 축하해.”
눈이 내린 교정의 모습은 절경이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 눈을 머금어 새하얀 옷을 입은듯했다. 반장이라고 불리는 아이는 많은 이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꼭 누군가를 찾고 있는듯한 행동에 그녀의 부모님은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묻는다.
“인사할 친구 더 있니?”
“네. 근데 안온 것 같아서요.”
“다음에 또 만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갈까?”
“그게……. 아니에요. 가요 어머니.”
기대하던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란스러운 교실은 당연하다는 듯이 누군가의 존재를 잊은 듯 부족함이 없었다. 아이는 제 교복 자켓 속 안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또각거리는 고체의 물체를 놓지 못하던 아이가 북적거리는 공간에서 홀로 중얼거린다.
“다음이 없을 거 같아서요. 어머니.”
“응? 상아야 빨리 오렴!”
재촉하는 목소리에 아이가 뒤늦게 교실 문을 벗어나 복도를 걷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 찾는 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없었고, 상아는 미련이 남는 듯 고개를 돌려 닫힌 교실 문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걸음을 이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니 귓가 근처 환청에 상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약간 괴로운 느낌이 몰려오는 듯했다.
* * *
“뭐야. 너 누구야?”
스트레스에 극이 달해 도피처로 삼은 옥상이었다. 6월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직후 소란스러워진 교실에 있을 자신이 없어 무작정 찾아온 이곳에서 나는, 내 인생을 뒤흔든 아이를 만나게 된다.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은 성적에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자 난간대에 기대 눈을 감고 있자, 뒤쪽에서 들리우는 앙칼진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번도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아이였다. 단정한 검은 단발머리에 비해 그렇지 못한 교복상탱에 나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조용히 이어폰을 끼어 아이의 말을 무시했다.
“야 종쳤어.”
“…….”
“안 들려? 종 쳤다고, 수업이라고!”
“들려요. 알고 있고요.”
처음이었다. 수업을 빼버린다니, 집에서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들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에 한숨만 연신 쉬고 있자, 그 순간 내 귀에 꽂힌 이어폰을 거칠게 빼낸 아이가 잔뜩 짜증이 돋은 얼굴로 나와 마주한다. 나 또한 기분이 언짢아져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일인가 싶은 마음에 입을 열자, 아이는 심드렁하게 제 뒤를 가리킨다.
“……선생님.”
“친구들이 옥상으로 갔다고 하길래…. 걱정이 돼서.”
“바람만 좀 쐬고 가려고…. 내려갈게요.”
“그래. 수영이 너도 빨리 내려가서 수업 듣고.”
“두고 온 게 있어서 올라온 거예요.”
수영이라는 아이는 옥상 문 옆에 놓여있던 제 가방을 들고 내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던진 후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무례한 행동에 무어라 말 한마디 얹지 못한 채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곧 선생님과 함께 반으로 내려가자, 반 아이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꽃힌다. 모두가 날 불쌍하게 쳐다본다는 그 시선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서랍 속 시험지를 구기며 이를 아물자 볼 안쪽이 시끈거린다.
“자자, 이미 지나간 시험은 신경 쓰지 말고! 다음 모고 준비해라.”
“네에.”
“교과서 피자 얘들아. 숙제도 같이 올려놓고.”
작은 탄성과 소란스러움이 또다시 교실에 맴돌았다. 나는 그저 귀를 막고 고개를 숙여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겁도록 내리 앉은 적막 속에 몸을 담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되고서 다시 찾은 옥상은 굳게 닫혀있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계단에 걸터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자 아래서부터 큰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감았던 눈을 뜨고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예상하던 인물이 서 있었다.
“수영이라고 했지?”
“아는 척 하지 말지.”
“낯을 많이 가리는가 보구나.”
“아니, 너한테 좋을게 없을걸.”
익숙한 듯 잠긴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적막이 깨어진 듯한 느낌에 몸을 돌려 반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반응은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안 들어올 거냐?”
“…들어가도 되니?”
“옥상이 내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허락을 맡아?”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 그러네…. 이런 나이 반응에 그 아이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난간대에 걸터앉아 매점에서 파는 흔한 빵 포장을 뜯어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옆에 앉을까 순간 고민했지만, 나는 옥상 문을 닫고는 그 옆에 살포시 앉아 이어폰을 들었다. 조용히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그 아이에 의해 나는 가만히 빵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이의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띄었다. 볼에 난 생채기와 찢어진 입가, 손가락을 감싼 붕대…. 평소라면 모른 척 지나갔을 그것들에 괜시리 호기심이 들어 입을 열었다.
“다쳤나 봐?”
“묻지 말지?”
“예쁜 얼굴에 흉 지겠네. 병원은 갔니?”
“뭐, 뭔 얼굴?”
얼굴이 붉어진 채 말을 더듬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 흐뭇 서러웠다. 나는 아이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선뜻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나의 사소한 질문에도 곧장 대답을 해왔다. 적막을 찾아 도피해온 이곳에서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피어오를 때마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편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수영이니?”
“한수영.”
“나는 유상아.”
“알고 있어. 유명하잖아.”
내가 유명하니? 나의 물음에 아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빵 한입을 더 깨물었다. 찢어진 입가가 아팠는지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싸웠니?”
“아니. 아빠한테 맞았어.”
“……미안.”
뭐, 딱히….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오히려 아이는 제가 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달랬다.
우리의 만남은 길게 일주일에 한 번, 짧게는 이틀에 한 번씩 꼭 이루어졌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듯한 만남은 칙칙하던 나의 일상에 물감을 얹은 듯 다채로워졌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종류라 그런지는 몰라도. 아니, 사실 그것은 내게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 그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학교 내의 평판과 사회로 나아갔을 때 이득이 되는 사람인지 등의 수많은 정보를 재고 따지는 비열 적인 생각 없이. 오롯이 나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균열의 시발점이 되어 훗날 우리의 관계의 걸림돌이 된다.
“미술부였니?”
“……소리 없이 좀 들어오지 말라니까.”
“잘 그리네. 예고를 갔으면 더 좋았을텐데.”
“우리 아빠가 보내줄 리가 없지.”
화려한 듯 화려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꼭 저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아이가 신기하면서도, 그림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쑥스러웠는지 작게 헛기침을 해댄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계시는 어머니 덕에 미술 쪽으로 많은 작품을 접했지만 이런 스타일의 그림은 처음이었다. 공부는 일절 손에도 대지 않는 듯하더니 이런 재능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 봐. 닳겠다.”
“이거 나 줄래?”
“……싫어.”
“왜?”
왜 싫은데? 나와 만나고 처음으로 들은 아이의 거절 의사에 당황한 것도 잠시 단호하게 그림을 치우는 아이의 모습에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얀 천으로 그림을 덮어버리는 행동에 나는 손을 들어 캔버스 틀을 만지작거렸다. 미련 버려라. 안 줄 거니까. 화구 통으로 들어 올리며 먼저 미술실을 나가려는 모습에 나는 그만 자존심이 섞인 말을 내뱉고 만다.
“내가 살게. 이 그림.”
“……너 지금 뭐라고.”
“살게. 어때?”
이렇게 하면 너도 날 거절하지 못하겠지. 라는 식의 의도가 짙은 물음이었다. 산다고 하면, 제값을 주고 팔라고 하면 너는 팔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에 대한 생각이 끝나기도 전, 순간 내 가슴팍으로 둔탁한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아이의 화구 통이었다.
“이게 무슨….”
“너 진짜…. 진짜 최악이었던 거 알지?”
“수영아.”
“너, 내가 얼마나 돈에 질색하는 거 알면서…! 너, 진짜.”
“수영아.”
“당분간 연락하지 마.”
지금 너한테 너무 실망해서 볼 수가 없을 것 같아. 여름방학을 앞둔 아이의 마지막 말은 차가웠다. 더운 여름날을 녹일 만큼 시리고 서늘해서 나는 차마 그 아이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모든 이가 바라온 방학은 내게 있어 지겨웠고 더할 나위 없이 지루했다. 언제쯤 이 기나긴 적막 속 일상이 끝날까 수없이 되뇌었다. 그런 말을 하는게 아니었다. 그 아이의 상황이 어떤지, 자존심이나 성격, 그 외에 모든 성향을 알면서 그런 한심한 말을 내뱉는게 아니었다. 다 내 잘못이었다. 실수였고 죄였으며 나는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무력감. 그것이 나를 옥죄었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내가 잘못을 빌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그리고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 하지만…….
“번호도 모르네….”
사는 곳도.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아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아이는 처음부터 나와 깊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무언의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먼저 물어본 적도 없었지만.
“새삼 부질없네. 너도나도.”
밖을 보니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지금 너는 뭘 하고 있을까. 또 맞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애정 섞인 마음이 울려퍼졌다. 그래. 나는 지금 네가 보고 싶다. 널 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내 행동에 대해 속죄를 할 것이다. 내 사과를 받고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널 보며 나는 그 작은 품을 안고, 마른 등을, 부드러운 검은 머리를 쓸어내리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입술을…. 입술을?
“……말도 안 돼.”
나는 스스로 내 입을 막고 고개를 떨군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상상했다는 듯이. 널 두고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한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얼굴이 달아오른 이유는 널 생각하는 이 마음 때문일까 더운 여름날 태양 때문인가. 나는 정해져 있는 답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망막 저 편에서 네 얼굴이 보여 가슴이 뻐근했다. 나는….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네가 보고 싶다.
개학까지의 시간은 매우 느렸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면서도 학교에서 아이를 만나 할말과 행동을 수도 없이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은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너와 다시 만날 개학일이 되었고, 나는 학교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수영이?”
“네. 학교에 오질 않아서요. 미술부도 반에도 없어서….”
“네게 아무 말도 없었니? 네가 가장 친해서 알 줄 알았는데.”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수영이 전학 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른 친척 집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고대한 개학이었다. 하지만 나를 맞이하는 건 아이가 없는 미술실, 그리고 전학을 가버렸다는 선생님들의 말에 나는 넋을 잃었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한수영이 내게 이럴 리가 없었다. 분명, 분명 다시 나를 보겠다. 그리 말했잖….
‘당분간 연락하지 마.’
‘지금 너한테 너무 실망해서 볼 수가 없을 것 같아.’
“……없어.”
다시 나를 보겠다 말한 적이, 나와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아이가 없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옥상으로 내달렸다. 혹여 문이 잠겨있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조마조마한 적은 인생에 통틀어 없었다.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게 느껴져 괜히 팔을 들어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한수영!”
다행히 열려있는 옥상 문에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허한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만이 나를 반기었고 나는 그대로 주저 앉아 다시 한번 눈물을 닦았다. 그때였다. 문 뒤로 무언가 거치적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 그 물체를 찾아냈다. 검은색 책가방. 그 아이의 가방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조심스럽게 지퍼를 내리자 작은 아크릴 물체와 종이 쪼가리가 보인다. 나는 한 손에 하나씩 남겨진 물건을 들었다. 아크릴은 아이의 학생증이었고 종이는 예상한 대로 작은 쪽지였다.
To. 유상아
나야. 한수영…. 갑자기 이사가 결정됐어. 네게 말하려고 했는데…. 번호가 없더라.
새삼 우리 사이가 부질없다고 느꼈어. 아마 너도 그렇겠지.
잘 지내라. 네 졸업식 날 학생증 받으러 올게. 그때까지 네가 가지고 있어.
사과는 그때 받을게. 그럼 이만 줄인다.
From. 한수영
* * *
“결국, 오지 않았네….”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아직 춥네요.”
“그러게~ 2월인데도 이렇게 춥네.”
과거를 회상한 상아가 제 어머니의 차에 몸을 욱여넣으며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학교의 전경을 훑었다. 3년 동안의 추억, 제 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소였다. 그런 상아를 배려하는 듯 그녀의 어머니 또한 잠시 상아를 바라보다 이내 조금 늦게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하고 교문을 빠져나오자 이제야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와도 끝이겠지. 번호라도 물어볼걸, 그때 내가 나가서 널 잡았더라면…. 실수는 짧았고 후회는 지독하리만치 길었다.
어렵지 않게 입학한 대학은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 하던 곳이었지만 상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나의 하찮은 자존심에 의해 억지로 들어온 학교. 생활이 즐거울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 할 친구도, 선배도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은 다행히 한두 명 있어 다행이었다.
“대학 졸업하면 어머니 갤러리 물려받으신다고요?”
“그건 또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뉴스 기사. 요즘 화제잖아요.”
독자는 심드렁하게 앉아 휴대폰 액정 너머 있는 기사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상아는 질렸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였다. 이런걸로 유명인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네요. 상아의 말에 독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진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맞고요?”
“……뭐, 네. 맞아요. 찾고 싶은 사람도 있고.”
“찾고 싶은 사람?”
“……첫사랑?”
첫사랑? 흥미롭다는 독자의 시선에 상아는 작게 웃으며 자리서 일어섰다. 비밀이라는 듯한 행동에 독자는 의외로 금방 호기심을 접었다. 상아는 이런 독자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독자는 갑작스럽게 온 전화에 금방 자리를 비웠고, 홀로 길을 걷던 상아는 독자가 보고 있던 뉴스 기사를 보며 문득 다시 한번 수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그림 계속 하고 있으려나.”
그럼 만날 수 있을 텐데. 헛된 희망이라 생각하면서도 상아는 실낱같은 그것을 놓을 수 없었다.
학년이 높아지고 생활이 바빠질수록 상아의 머릿속에서 수영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이제는 얼굴 또한 기억이 나지 않는 듯했다. 가끔 꿈속에 나와 수영을 붙잡아 돌리면 얼굴을 덮인 검은 칠이 그녀를 괴롭혔다. 찰랑거리는 검은 단발머리와 매일 먹고 있던 사탕, 그리고 빵 부스러기. 좋은 향. 진한 유화 냄새…. 상아는 띄엄띄엄 기억하는 마지막 끊을 부여잡고 한참이나 꿈속에서 헤맨다. 그리고 눈을 뜨면 다시 맞는 아침에 실망한다. 이제는 놓을 때가 된 것 같아 서러웠다.
“졸업과 생일 축하해요. 그리고 갤러리 건도…!”
“고마워요.”
졸업 선물 겸 생일선물로 받은 어머니의 갤러리에 들어서자 꽃을 들고 상아를 반기는 독자가 서있는다. 수수하게 꾸민 갤러리 벽면을 손으로 한번 쓸어내린 상아가 작게 웃자 독자는 제 뒤에서 주섬주섬 캔버스 사이즈의 무언가를 꺼내기에 이르렀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건 대체 뭐예요? 상아가 물었다.
“상아씨를 아는 누군가의 선물?”
“……독자씨가 주는 선물이 아니고요?”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가 있는데 글쎄 걔 작업실에 갔더니 이게 있더라고요?”
“……….”
“이 사람 알고 있냐고 물어보니까 아무 말도 없길래. 상아씨 근황을 알려줬더니 줬어요.”
독자의 말에 상아의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상아는 다급하게 그 자리에서 선물을 뜯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은 계속해서 삐끗거렸고 독자는 그런 상아의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얀 포장지가 거칠게 벗겨 나갔고 이어 선물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게……. 무슨.”
상아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그리운 고등학교 옥상에 걸터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모습. 귀에 꼽힌 이어폰과 교과서, 그리고 상아의 옆에 있던 수영의 책가방까지…. 작가가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멍하니 앉아있던 상아의 뒤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상아는 독자라고 예상하며 조용히 벗겨진 포장지를 정리했다.
“이거 팔게. 그림.”
“………?”
그리운 누군가의 목소리에 상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 있는 인영을 바라본다. 천장에 달린 조명으로 인해 눈이 부셨지만 꼭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수영.”
“왜 불러 유상아.”
“한수영.”
“…야, 야! 울지마. 왜 울어!”
나도 몰라. 아이처럼 뚝뚝 흐르는 눈물에 수영이 당황해 상아의 앞에 주저앉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혹시 꿈이 아닐까? 이러다 고개를 들면 또 검은칠 된 얼굴이랑 마주 하는 것은 아닌가? 상아는 두려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때 수영의 억센 손이 상아의 고개를 억지로 들어올렸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상아가 조심스레 눈커풀을 들어올렸다.
“……진짜 한수영이네.”
“그럼 가짜 한수영도 있을까 봐?”
“진짜, 진짜 한수영이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림값. 뭐로 지급할래?”
난데없는 그림값 이야기에 상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무드 떨어지게 갑자기…. 잔뜩 실망한 얼굴의 상아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받고 싶은데?”
“나한테 줘야 할 거 있잖아.”
“……학생증?”
“그리고…. 너.”
수영의 말에 놀란 상아가 입을 어버버 거리자 수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너. 나 좋아하잖아.”
“……….”
“바보야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짓지마. 너 엄청 티 났으니까.”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진득하게 쳐다보는데 모를 리가.”
상아를 일으킨 수영이 더러워진 상아의 무릎을 털어내고는 다시 한번 묻는다.
“지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시불로.”
“예~ 일시불이요.”
“근데 이거 생일선물 아니니?”
“생일선물은 따로 있는데.”
수영의 말에 상아가 또 다시 놀란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걸로 모자라 내 초상화를 팔겠다고 그러지 않나…. 이제는 생일선물까지 또 준다는거야? 다정한 물음에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서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생일선물은 네가 가지고 싶은걸 줘야지.”
“난…. 그림이면 되는데.”
“그림은 내가 팔거라니까? 가지고 싶은거 더 없어?”
“……너?”
이제야 얘기해주네. 이 답답아. 활짝 웃은 수영이 그 고운 손으로 상아의 두뺨을 감싸 천천히 다가온다. 꿈일까? 꿈이라면 부디 깨지 않길…. 다가오는 수영의 얼굴에 상아는 두 눈을 감고 행복을 만끽했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쪽쪽 대던 수영이 답답했는지, 상아는 대담스럽게 입을 열어 부드러운 입술을 삼키고 빨았다. 예상하지 못한 대담한 상아의 행동에 수영이 뒷걸음질 쳤고, 상아가 이를 놓칠리 없었다. 부족함이 하나 없는 훌륭한 생일선물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였다.
*epilogue*
“야. 근데 너 나한테 할 말 없냐?”
“무슨 말?”
“고등학…….”
“그땐 미안해…. 네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때려도 좋아.”
“미쳤나봐.”
수영이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휘젓자 상아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제 지갑을 꺼낸다. 또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야? 가시 있는 말에 상아는 절대 아니라며 부정했다. 수영의 에상과는 달리 상아의 지갑에서 나온 것은 수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였다.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든 수영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연다.
“나 근데 진짜 말하고 가려고 했는데…. 네가 어디 사는지 조차 몰라서.”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다신…. 너 안 놓으려고.”
그건 내가 할말이야. 상아의 대답에 수영이 만족한 듯 웃어보인다. 유독 따듯한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