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부터 1일
아침부터 소란이 끊기지 않았다. 한수영은 부스스한 얼굴을 들고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휘파람을 부는 소리며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시끄러운 복도에는 묘한 긴장감마저 돌았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누가 또 공개 고백이라도 한 것이 분명했다. 해마다 이 시기만 되면 여기저기서 설레는 목소리들로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야, 반장 올해도 고백받았대.”
“진짜? 이번엔 누군데?”
“그, 3학년에 회장 선배!”
마침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엎드린 한수영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 왔다. 한수영의 존재도 잊은 두 학생은 저들끼리 신나서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자꾸 들리는 익숙한 존재의 이름에 남몰래 한숨을 푹 쉬었다. 무려 올해에도 고백을 받은 잘난 주인공인 ‘반장’은 한수영도 익히 알고 있는 이였기 때문이다. 그제야 복도 쪽으로 난 창가 너머로 갈색 머리가 보였다. 하필이면 복도 맨 끝자리인 것이 이렇게 짜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다음에 자리를 바꿀 때는 기필코 창가에 앉아야겠다고 다짐하며 갈색 머리칼을 노려보았다.
한쪽으로 예쁘게 모아 묶은 머리가 어깨를 타고 내려오고 교복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 그다웠다. ‘유상아.’ 조그만 명찰에 이름 석 자가 가지런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회장은 까만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유상아보다 한 뼘은 작은 학생이었다. 두 조합이 퍽 잘 어울려 입맛이 썼다.
“대박 둘이 잘 어울리겠다.”
몇 년을 반복해서 봐온 장면이었으나 볼 때마다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유상아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나왔다는 이유로 고백을 받는 것을 본 횟수만 두 손가락을 넘어갔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인지 받는 고백이란 족족 거절했던 전적이 있어 저 회장이란 작자도 차일 것을 예상했으나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헐, 반장이 찼나 봐.”
“진짜?”
동시에 교실로 우르르 몰려와 아무 일도 없는 척 제 할 일을 찾아 소란스럽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움직임이 어찌나 재빠른지. 그리고 이 모든 소란의 주인공인 유상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수영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불도저라도 된 듯 엎드린 채 꼼짝도 안 하는 한수영을 향한 눈빛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빙긋 웃은 유상아는 한수영의 귀 바로 옆에 얼굴을 붙였다. 귀를 가린 검게 뻗은 직모를 몇 가닥 집어 귀 뒤로 넘기자 한수영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자?”
“아! 자는 데 왜 방해야!”
귀 끝이 새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돌리자 유상아는 턱을 괴고 대놓고 한수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목부터 빨개져 놓고 아니라고 바락바락 우기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주변을 에워싼 학생들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입을 맞추었을지도 몰랐다.
유상아는 누구보다도 한수영의 기분에 민감했다. 따라서 그가 고백을 받는 날마다 땅바닥으로 가라앉는 한수영을 잘 알았다. 오늘도 그런 수많은 날 중 하나였다. 9월 17일인 오늘 고백하여 커플이 되면 크리스마스에 딱 100일이 된다 하여 이름이 붙은 날이라지만 안타깝게도 유상아에게는 귀찮은 날 A에 불과했다. 이날만 되면 아이들이 묘한 자신감을 얻고 용기를 내어 제게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잔뜩 심술난 한수영의 얼굴을 보는 것이 꽤 재밌었지만 말이다.
“뭐하냐.”
“머리 정리해주는데.”
머리를 귀 뒤로 넘기자 체리 색으로 물든 귀 끝이 뜨겁게 불탔다.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부터 분리되고 마치 둘만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에 100일이 뭐라고 이렇게 야단법석인가 싶었던 유상아는 한수영과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했다.
“수영아.”
“왜, 뭐, 무섭게 무게를 잡고 난리…,”
“오늘부터 사귀면 크리스마스에 100일이 된다더라.”
한수영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쯤의 표정을 지으며 유상아를 보았다.
“자리에 앉아라.”
때마침 들어온 선생님의 등장에 유상아는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앞을 돌아보았다. 한수영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가득 떴지만, 유상아는 한수영에게 끝내 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수업이 끝나자마자 담임 교사가 부른 탓에 곧바로 일어나 밖으로 향했고, 메시지로 온 이따 봐. 라는 문자 세 글자에 한수영은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
이 세상에는 사람을 빡치게 하는 방법이 딱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첫 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아악! 유상아 짜증 나!”
한수영은 지금 고통받고 있다. 바로 점심시간 후 유상아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 때문이었다. 분명 뒤에 할 이야기가 더 있던 것 같은데 타이밍 좋게 들어온 선생님 탓에 뒷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한수영만큼이나 애가 탔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는 시종일관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하며 쉬는 시간이 되기 무섭게 엉덩이를 떼었다. 하필이면 걷어야 하는 유인물도 많고, 각종 행사가 많은 9월이기에 한수영은 뭐라 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릴 뿐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미안해.”
그래, 많이 기다렸다. 화를 내려던 한수영의 입에 상큼하고 동그란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입안 가득 퍼지는 상큼하고 달콤한 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을 오물거리며 사탕을 굴렸다. 자연스레 본인의 가방과 한수영의 가방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유상아를 보고서야 그에게 또 당한 것을 깨닫고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유상아는 한수영이 나오고서야 불 꺼진 교실 문을 자물쇠로 잠갔다. 커다란 창문 틈새로 해가 저물어 주황빛의 해가 눈이 부셨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말없이 텅 빈 복도를 뚜벅뚜벅 걸었다. 땅으로 시선을 내리자 유상아의 실내화와 한수영의 파란 줄무늬 슬리퍼가 나란히 보였다.
“야, 유상아.”
“네?”
“아니야, 됐다.”
막상 들으려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혹 그의 입에서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같은 말이라도 나오면 어떡하지. 같은 걸음으로 걷던 발소리 하나가 멈추고, 자연스럽게 슬리퍼 또한 멈추었다. 한수영은 가만히 뒤를 돌았고, 마침내 유상아를 마주하였다.
평소와 같은 얼굴, 같은 표정인데. 묘하게 상기된 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긴장한 것만 같은 것은 왜일까. 한수영의 심장이 크게 펄쩍거렸다. 그 탓에 성큼성큼 제 앞에 다가오는 유상아의 발걸음에도 감히 뒷걸음질도 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고개만 들었다.
“한수영.”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한수영은 제 손을 잡은 유상아의 작고 흰 손에서 느껴지는 빠른 맥박을 가만히 느끼며 울렁이는 심장을 부여잡고만 싶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듯한 긴장감과 함께 유상아와 눈이 마주치고,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좋아해.”
“…어?”
주홍빛으로 일렁이는 빛에 유상아의 얼굴이 물들었다.
“좋아해.”
한수영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듯 유상아는 그렇게 속삭였다. 귀 바로 옆에 속삭이는 유상아의 입술은 자연스럽게 허공을 가르고 한수영의 볼을 두드리듯 가볍게 어루만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한수영은 유상아에게 잡힌 손을 떼지도 못했다.
“우리 사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