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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X-Mas

   “수영 씨, 다음 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뭐 할 거예요?”

   “글쎄, 그건 왜?”

 

   뜬금없는 질문에 한수영은 여태 크리스마스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따위를 떠올렸다. 기념일을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니었고, 함께 즐길 사람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크리스마스란 지나가는 휴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것에서 딱히 박탈감을 느낀다거나 서글프지도 않았지만, 종종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 탓에 달갑지 않은 주제이기도 했다. 유상아가 그럴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런 걸 묻나 싶어 은근히 경계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것이 한수영과 유상아가 사귀기 석 달 전, 있었던 일이다.

 

 

*

 

 

   신간이 나올 시기가 되면 극도로 예민한 탓에 한수영의 집 초인종 소리는 다른 아파트 단지보다 작았다. 이 때문에 종종 그의 집에 방문하려던 이들이 헛걸음하기도 했으나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오히려 귀찮은 일이 줄었다며 좋아했다. 그런 그의 집에도 단 한 사람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데, 바로 애인 유상아였다. 술에 취한 한수영을 데려다주고 난 뒤부터 자연스럽게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그는 거의 같이 살다시피 굴 때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웬일인지 유상아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전날부터 만나자고 약속을 잡던지, 며칠 전부터 집에 눌러앉아 저를 못 자게 밤새 괴롭혔을 그가 잠잠한 것이 어쩐지 불안했다. 단순히 애인이 집에 눌러앉지 않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은근히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유상아는 작은 기념일 하나 잘 놓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성격에 거창한 이벤트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기념일만큼은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는 이였다. 그의 챙김에 그새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지 한수영은 빈 화면을 계속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영아?

   “어, 어? 유상아?”

 

   잠시 멍을 때렸더니 초인종 소리를 놓친 듯 유상아가 문을 톡톡 두드리며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비밀번호를 치고 제집처럼 잘도 들어왔으면서 갑자기 저러는 것이 미심쩍었으나 한수영은 유상아의 방문이 싫지 않았으므로 현관문으로 뛰듯이 달려갔다.

 

   “아 진짜 더럽게 두드리네. 좀 기다려!”

 

   괜히 퉁명스럽게 말하며 문을 열자 긴 코트에 목도리를 야무지게 여민 유상아가 보였다. 양손을 가득 채운 짐에 한수영이 놀라기도 잠시, 평소와 달리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에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뭘 그렇게 많이…, 것보다 안 들어와?”

   “뭐 하고 있었어요? 초인종 소리도 못 듣고.”

   “그거야…….”

 

   온종일 연락 온 건 없나 휴대폰만 보느라 못 들었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할 것이다. 뒤를 흐리며 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삐딱한 자세에 유상아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한수영보다 한 뼘은 큰 키의 그가 지나가자 그가 뿌리는 향수가 체향과 기분 좋게 섞인 듯했다. 유상아가 걸음을 뗄 때마다 양손에 들린 짐들이 달랑거렸다. 한수영이 하나를 들어주려고 하자 괜찮다며 한사코 거절한 그가 거실 소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화면이 까맣게 꺼진 휴대폰, 그리고 먹다 남은 감자칩 봉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유상아는 그대로 제 짐을 소파 옆에 두고선 멍하게 서 있는 한수영을 끌어당겨 제 옆에 앉혔다. 순식간에 유상아의 옆에 앉은 한수영은 아직 채 데워지지 않은 바깥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밀려드는 연인의 시트러스 향에 얼굴을 붉혔다.

 

   “우리 크리스마스 파티해요.”

   “어, 엉?”

   “트리도 가져왔거든요.”

 

   그제야 한수영은 그가 양손에 가득 들고 온 것들이 트리와 트리 장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저 없는 사이에 작정했다 싶어 한수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동시에 서글서글 웃고 있는 저 표정을 보고 있자니 거절을 할 수도 없고.

 

   “그래, 뭐 하면 되는데!”

 

*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트리를 만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지난 이 시간에. 유상아는 한수영이 점심을 먹었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트리를 꺼냈다. 처음 조립 전, 해체된 트리를 본 한수영은 인공 잎이 다닥다닥 나 있는 기둥 여러 개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더랬다. 그것을 유심히 보던 유상아는 축 처진 줄기 부분을 당겨 펼쳤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꽂는 거예요. 한번 해 볼래요?”

 

   한수영은 반대쪽 줄기 부분도 유상아가 했던 것처럼 펼쳐 잎을 구석구석에 꽂았다. 드디어 트리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에 한수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수영의 키만 한 트리는 생각보다 웅장하고 예뻤기 때문이다. 아닌 척하면서도 기쁜 티를 숨기지 못하는 한수영의 손에 장식이 든 상자를 들이밀자 그가 조그만 방울들을 잡고 트리 이곳저곳에 달기 시작했다.

 

   “수영 씨, 이거 좀 잡아 줄래요?”

   “이게 뭔데?”

   “이따 예쁜 거 보여줄게요.”

 

   기다란 전선에는 조그만 전구들이 오목조목 붙어있었다. 한수영은 그것을 유상아가 시키는 데로 트리에 두르기 시작했다. 방울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트리에 장식하는 일은 꽤 집중을 필요했기에 어느샌가 한수영은 트리에 흠뻑 빠져있었다. 사슴과 초록 리스, 빨간색과 초록색 줄무늬가 난 리본, 종, 크고 작은 장식물들을 상자에서 꺼내 트리에 걸자 꽤 예쁜 모양새가 되었다.

   한수영은 마침내 바닥에 남은 별을 집었다. ‘Merry Christmas’ 글자가 반짝거리는 별 장식을 꼭대기에 매달고 유상아의 옆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어느샌가 불을 끄고 전구를 켜자 트리가 반짝거렸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나쁘진 않네.”

 

   유상아는 이제 그 표현이 좋다는 뜻임을 알았다. 때문에, 그는 바로 옆에 선 한수영의 온기를 느끼며 커다란 창을 가득 메운 트리를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어두웠던 하늘에 하얗고 반짝이는 눈이 내렸다. 트리 위에 눈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늘 삭막하기만 했던, 크리스마스도 여느 주말 같기만 하던 날 대신, TV 어느 채널에서나 들리는 흔한 캐럴을 들으며 눈이 쌓이는 트리를 바라보는 것은 생각보다 좋은 일이었다. 불이 꺼진 어두운 거실에 조그만 전구들이 여러 색을 내며 빛나 눈동자에 반사했다. 한수영은 문뜩 제 곁을 지키고 있는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트리가 아닌 저를 보던 뜨거운 눈빛에 한수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유상아.”

   “네?”

   “…마워.”

   “음, 잘 안 들리는데.”

 

   뻔히 들었다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유상아의 옆에서 한수영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부들거렸다. 유상아는 그런 서툴고 귀여운 연인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참을까 말까 고민하던 유상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내렸다. 입술이 허공을 가르고 한수영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입이 맞춰지는 간질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수영은 한결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멍한 얼굴로 제 머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문지르는 그의 모습이 생각보다 귀여웠다.

   귀 끝부터 빨개지기 시작하던 얼굴은 금세 터질 듯 익기 시작했다. 말도 잇지 못하고 입을 크게 벌린 한수영은 마침내 상황을 파악하곤 갈 길을 잃은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수영아.”

   “어…?”

   “메리 크리스마스.”

 

   다시 아래로 고개를 숙인 유상아의 입술은 이번엔 한수영의 머리나 이마가 아닌, 정확히 입술을 노렸다. 말캉한 입술로 멍하게 벌어진 입술을 머금고, 혀를 넣어 부드럽게 감싸자 놀라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얀 눈이 창밖에 쌓여갔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어느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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